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-당 전쟁 (문단 편집) === 영류왕의 유화책과 당의 첩보전 === [[고구려]] 역시 이러한 정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. 고구려는 수나라 포로들 일부를 모아 당나라에 송환하기도 했으며, [[동돌궐]]의 [[힐리가한]]이 멸망한 직후인 629년에 당에 봉역도(封域圖)를 보내어 축하를 하는가 하면 641년에 [[고창국]]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알고 당에 대한 의전을 강화하기도 했다. 631년 7월, 당 조정은 말단 관리들을 파견하여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전쟁 때 죽은 수군의 유골을 수습하고, 고구려가 만든 [[경관]](京觀)[* 수나라 군사의 시체를 묻고 쌓은 전승 기념 시설]을 허물라고 강요했다. 현대 한국으로 치면 [[전쟁기념관]]과 [[국립현충원]]에 해당하는 전승 시설의 철거를 외국의 말단 관리들로부터 강요받는 것은 명백하게 고구려에 대한 위협이자 도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고구려는 이에 굴복하여 경관을 허물게 된다.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위협을 느껴 [[천리장성#s-2|천리장성]]을 쌓기 시작하였다. 640년에는 영류왕이 태자를 당에 보냈으나 641년 5월에 당에서는 직방랑중 [[진대덕|진대덕(陳大德)]]을 사신으로 파견하였다. '직방랑중'은 태자의 답례사라 보기에는 얼굴에 침을 뱉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직급에서 격이 떨어질뿐더러, 국내외의 주요 군사 시설을 포함한 지도 제작을 관장하는, 군사 정보 수집의 실무를 담당하는 직책이었다. [[진대덕]]은 자신이 경치 좋은 곳의 탐방을 좋아한다면서 평양으로 가는 도중에 고구려의 주요 산천과 성곽 및 교통 요지들을 두루 살피면서 정보를 모았다. 게다가 고구려의 관리들에게 비단을 뿌리고, 고구려의 백성이 되어 살고 있던 옛 수나라 출신의 포로들을 위로하여 인심을 사 의심까지 피했다. 당시 고구려에서는 최고위직인 [[대대로]](大對盧)가 말단 관리인 진대덕의 숙소를 세 번이나 찾아가는 등 위압을 느끼면서도 농락당하고 있었다. 이 해 8월, [[진대덕]]은 귀환하는데 그가 얻은 정보를 봉사고려기(奉使高麗記)라는 제목으로 엮어서 당 태종에 보고하였다. 당태종은 기뻐하며 노골적으로 고구려 공격에 대한 야욕을 보였고, 기회만 오면 공격하겠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. 당시 국정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[[영류왕]]은 [[연개소문]]을 여타 귀족들과 함께 견제하려 하였지만, 이는 역으로 막리지 [[연개소문]]이 [[쿠데타]]를 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. 이후 연개소문이 영류왕 등 100여 명[* 《[[일본서기]]》에는 180여 명]을 제거한 후 [[보장왕]]을 옹립하고 자신은 고구려의 최고 실권자로 떠오르면서 고-당 양국 간에 긴장이 고조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